성령 충만한 사람 스데반

사도행전 7장 54절~60절

내용관찰: 스데반이 모함을 받아 공회에 잡혔을 때에, 자기 변호를 하지 않고 오히려 유대교인들을 꾸짖자, 그들은 마음이 찔려 이를 갈듯 분노하게 됩니다.주위에 자신으로 분노하는 상황에서도 스데반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과 그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고 말한 스데반을 향해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귀를 막고 막무가내로 그 분노를 돌로 분출하게 됩니다. 성밖으로 끌려나가 돌에 맞으면서도 스데반은 예수님께 영혼을 바칩니다. 마지막 순간에 죄를 이 사람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를 하고 잠이듭니다..

연구와 묵상: 사람들은 왜 스데반에 대해 이를 갈고 화가나있었을까요? 앞의 6장과 7장의 말씀을 보면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고 기적과 표적을 행하는 중에 유대인들과의 논쟁을 하여, 지혜와 성령으로 항상 승리하였지만, 이를 시기한 사람들의 모함으로 공의회에 끌려갑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모세의 관습을 뜯어버리겠다 했다는 모함이었습니다. 모함의 내용을 변호할 시간을 얻은 스데반은 자기 변호에 애쓰지를 않습니다. 구약의 내용을 설명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성령을 거역한 것을 본 받을 뿐아니라 예수님을 죽이기까지하는 더 큰 죄를 지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공회에 잡혀가 심판을 받는 자리에서도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와 같이 평온했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데에만 집중했습니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분노하고 이를 갈지만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하늘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돌에 맞아 죽는 상황세서도 피하지않고자신의 영혼을 받아달라고 기도합니다. 육체의 고통과 모함으로 인한 억울함은 성령 충만한 스데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예수님 닮은 모습으로 자신을 모함하고 돌을 던진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간구하면서 예수님 닮은 모습으로 잠듦니다.

느낀점: 이전에 스데반의 순교와 믿음의 선배들의 순교와 박해를 들을때에는 존경스러운 것 뿐아니고 안쓰럽고, 어떤면에서는 불쌍하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제자 훈련내용인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예습하고, QT를 하면서,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그런 고통을 인내 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인간으로는 할 수 없지만 그 분들과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도우시고,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이 기뻐하시는 데로만 따르는 삶을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고통을 이기는 기쁨이 넘쳤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전에 느꼈던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기를 간구 하며 기도했지만, 어떤 것이 성령 충만인지도 몰랐습니다. 내 마음이 기쁨에 넘치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성령이 충만하면 그렇게 되겠지만, 성령 충만은 성령에 전적으로 사로잡혀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일만을 하는 상태임을 알게되었습니다.

결단과 각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과 나의 죄의 본성에 대해 배우고, 죄의 본성이기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할 때가 많았고, 어떻게 하면 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내 의지로 죄를 이기려고 했습니다. 오늘 QT와 예습을 하면서, 내 삶속에서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그대로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이고, 죄를 이기는 삶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항상 계시고, 성령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항상 생각하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긍휼하심을 입은 강도 만난 사람

누가복음 10장 30절~37절

내용관찰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  이 영생을 얻는 방법에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자기의 이웃이 누구를 말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한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당해 거의 죽어가는 한사람이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지만, 어떤 사마리아 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치료해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비용을 치르며 돌보아주라고 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다시 올때 갚는다고 하고 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연구와 묵상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길이 골짝길이고, 험해서 군데 군데 강도가 숨기 좋은 곳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으로 하나님 말씀이 있는 곳으로 생각 할 수있고 여리고는 죄악된 세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세상에서 사탄 마귀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삶을 살던 우리는 여리고가는 길에 강도들 만나 옷이 벗겨지고, 매를 맞아 죽어가는 그 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 당시 제사를 담당하고, 성전의 모든 일들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은 하였을지는 모르지만, 형식에 얽매여 있을 뿐,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 이웃이 되어 주진 못합니다. 사랑이 없었습니다.  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을 긍휼이 여깁니다. 죽어가는 한 사람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소중한 물품들로 치료해주고, 주막으로 옮기고, 돈을 주고 치료를 맡깁니다. 뿐만아니라 더드는 비용은 다시 와서 갚는 다고 까지합니다.강도당한 사람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준 사마리아인에게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죄악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믿기만하면 영생을 허락하신 예수님,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다시오실 것을 약속하신 예수님. 비유를 다하시고,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심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어려움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진정한 이웃이 되어주라는 명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니다.

느낀점

저의 진정한 이웃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았는데, 제가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누군가의 진정한 이웃이 되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한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 반성하였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은 잊고, 나 홀로 죄를 짓지 않고, 회개하기에만 급급한것은 아니었는지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저 또한 죄의 권세에 강도 당해  죽을 수 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믿게 하시고 값없이 의롭게 하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삺을, 하나님의 자녀된 영생의 삶을 허락받음에 감사함으로 끝나지 않고, "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는 주님의 말씀데로 어려운 가운데 있거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단과 적용

주위 사람들의 어려움에 관심이 많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위에 어려움이 있는 분들이 있는지 더 관심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알아보고,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여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불우이웃을 위한 기부를 더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0-37)

할렐루야. 주님의 평안함을 소유하셨습니까? 그러면 오늘 은혜 다 받으신 거예요. 주님의 평안함을 빼앗기면 안돼요. 우리를 너무나 낙심케 하는 것도 많고 상처 입히는 것도 많고 괴롭게 하는 것도 많은데 주님의 평안함이 있으면 되요. 그러면 우리가 넉넉히 이 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10장 30절로 37절 말씀 가지고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그 사랑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예요. 십자가가 무엇이냐? 하나님 사랑 수직선, 이웃사랑 수평선,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합쳐진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 믿고 사는 사람들은 그 사람 자체가 사랑에 삶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참 사랑에 모습을 보여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고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 사랑의 본체시기 때문에 우리는 넘치는 사랑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진정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어요. 은혜를 제대로 받을 수가 없어요. 사랑이 없어 이 세상이 병들어 갑니다. 그래서 이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사랑 할렐루야.

우리가 사랑으로 변화되어야만 병든 세상을 치료할 수 있어요. 병든 가정을 치료할 수가 있어요. 병든 이웃과의 관계를 치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들의 사랑이 매우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이기주의적인 사랑입니다. 나 혼자만 잘 되면 되고 옆의 사람이 어떻게 되든지 관심이 없어요.

진정한 사랑은 이기주의적인 사랑이 아니라 남에게 베풀고 나누는 이타주의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한 그 사랑의 모습이 오늘 그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널리 알려진 사마리아 여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1. 강도 만난 사람
첫째로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 말씀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 이스라엘 나라에 예루살렘은 굉장히 높은 고지대에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37km~35km 정도 되는데 이 골짝길이고 길이 험해서 군데군데 강도들이 숨어 있다가 나타나서 가진 모든 것을 빼앗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들이 강도를 자주 만나기 때문에 늘 주의해야 됩니다. 영적으로 예루살렘은 천국이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고 여리고는 타락한 세상인데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천국을 떠나서 죄를 짓고 세상으로 내려간 자들이 악한 원수 마귀인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다 빼앗기는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가 그곳을 하나님께서 작은 천국으로 만들어 놓으셨는데 하나님 앞에서 죄짓고 불의하고 타락해서 쫓겨나게 됐어요. 에덴동산을 쫓겨난 아담과 하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시와 엉겅퀴였습니다. 육신의 질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마귀가 와서 건강도 빼앗아가고 물질도 빼앗아가고 행복도 빼앗아가고 완전히 삶을 파괴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다 강도 같은 삶을 살아요.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 절망을 가져다줍니다.

얼마 전에는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앞에서 일어났던 총기사건 이 사람이 자기가 해고당한데 앙심을 품고 총을 휘둘러서 2명이 죽고 그 자리를 지나가던 사람 9명이 중상을 입었어요. 다 저들은 길거리에서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생명을 강탈당해서 죽고 건강을 강탈당해서 총에 맞아서 중상을 입고 병원에 갇히게 된 거예요.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어요. 강도 맞은 사람이 예고를 당하고 강도를 맞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강도를 만난 거예요. 우리에게 문제가 다가오듯이 예고 없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강도 맞은 삶은 언제부터 시작되느냐?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 때부터 지금가지 계속되어서 우리는 강도 맞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강도 맞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마귀가 와서 우리를 시험해서 건강도 빼앗아가고 가정의 화목도 빼앗아가고 기쁨도 빼앗아가고 그래서 우리를 낙심시키고 절망시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할렐루야. 예수를 믿으면 우리가 죄에서 놓여남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 죽어가는 거예요.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랬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어서 ‘너는 이제부터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다.’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죄 덩어리인데 예수님의 피로 덮어가지고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 하나 때문에 의의 세마포를 입혀주셔서 이제는 의의 옷을 입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죄 짓고 불의하고 방탕할 때에 우리가 병들어 누워 있을 때에 우리가 환란 중에 고통당하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우리의 이웃이 되어주시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고 희망을 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우리를 천국 길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나를 얼마나 놀라게 하는지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할렐루야.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일생의 고백이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야지 복을 받아요. 할렐루야.

2. 참된 이웃
둘째로, 누가 참된 이웃입니까? 참된 이웃에 대해서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누가복음 10장 31~32절에,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여기 보니까, 성전에서 제사를 담당하고 모든 것을 주관하는 제사장이 마침 이 길을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그랬어요. 레위인은 누구입니까? 당시 성전에서 성전을 섬기는 일을 하는 분들이 레위인 인데, 요즘으로 말하면 교회에 직분을 맡은 봉사자들이에요. 남녀선교회 위원들이 다 레위인이에요. 성가대도 아무나 못해요. 성가대 오케스트라도 다 레위인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레위인이 모든 예식을 주관하고 그 예식을 통해 하나님을 섬겼는데 그러니까 가장 신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레위인도 그 강도 만난 사람보고 피해서 딴 길로 간단 말입니다. 자,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있어요. 강도 만난 우리를 구원해 줄 분은 사람도 아니고 종교의식도 아니고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 한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이웃은 우리 예수님입니다. 종교의식이, 화려한 종교의식이 우리를 구원해줄 수가 없어요.

제가 아는 장로님 따님이 남편이 카톨릭이어서 카톨릭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참석한 적이 있어요. 미국에 있을 때요. 결혼식을 한 시간 반을 해요. 몸 약한 신부는 졸도하겠더라고요. 그러나 예식이 굉장히 화려하더라고요. 중간에 꽃을 들고 가서 성모마리아에게 갖다놓고 뭐 노래를 부르고 뭐하고 한 시간 반을 해요. 그러나 아무리 예식이 화려해도, 아무리 예식이 장엄해도, 아무리 예식이 모든 것이 잘 조화 있게 구성되어 있어도 예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리 종교지도자가 영적인 리더가 잘 모든 것을 담당하고 그렇게 해도 그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예수님이, 할렐루야. 모든 영광 주님께 돌립니다. 할렐루야. 여기 서있는 저는 누구냐? 저는 머슴. 주님 심부름 하는 사람. 조금 격을 높이면 우편배달부, 주님이 주는 사랑의 편지를 전달 해주는 거예요. 매 주일 와서 여러분에게 전달해 주는 거예요. 절대 제가 하는 심부름 하는 일을 통해서 주님 높임을 받아야지 인간의 모습이 나타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 주님만 할렐루야. 우리 찬송했잖아요. 이 땅에 오직 주밖에 없네. 할렐루야. 주님 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 것처럼 이 세상 사람이 종교의식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모든 우리 예배드리고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것의 근본적인 내용은 사랑이에요.

마태복음 9장 13절에,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나는 강도 맞은 사람을 위해서 왔고 상처 입은 사람을 위해서 왔고 죄로 인해 절망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왔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강도 맞은 우리가 쓰러져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준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갖고 나아가서 우리 주위에 강도 맞은 사람들을 구원해줘야 해요. 상처 입은 사람을 구원해줘야 해요.

건강을 강도 맞은 사람이 병원에 누워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병원에 가서 기도해줘야 해요. 이웃이 되어 줘야 해요. 제가 잘 아는 어떤 귀한 직분에 있는 분이 아직 재판이 진행되는 중인데 구치소에 들어가 있어요. 아니 형을 확정하기 이전에 조사를 하면서 미리 집어넣었어요. 참 문제가 있는 거 같아요. 재판이 딱 끝날 때까지는 유죄인지 무죄인지 아직 모르는 건데 미리 집어넣어 놓고 구속수사를 한다 말이죠. 그래서 제가 면회를 가려고 신청을 했더니 면회를 못 옵니다. 위에서 지시가 내려와서 아무도 면회를 해주지 말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연락을 하고 또 연락을 했더니 이젠 와도 됩니다. 그래서 제가 가서 기도해 드리려고 해요.

그러면 이분은 예수를 믿는 분이고 또 그 지역에서 존경받는 분인데 그 밑에 학교에 행정을 하는 사람이 무슨 착오가 있는지 그걸 고발해 가지고 학교에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가 계신 것인데 그럴 때 우리가 가서 기도를 해주면 얼마나 그분이 감사하겠어요. 유죄, 무죄를 떠나서 감옥에 가 있을 때 기도를 해주고 병원에 누워있을 때 기도를 해주고 먹을 것 없어서 굶주려 누워 있을 때 쌀 한 포대 짊어지고 가고, 라면 몇 박스 짊어지고 가고 이것이 사랑이에요. 이것이 이웃입니다. 할렐루야. 보세요.

누가복음 10장 36절에,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11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전하신 말씀이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선한 이웃이 되고 사랑을 실천하며 이것을 보고 ‘아 저사람 예수 믿는 사람인데 참 우리가 본받을 만한 사람이다’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똑같이 싸우고 똑같이 죄짓고 똑같이 욕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우리를 존경하지 않을 뿐더러 ‘아이고 저런 사람이 예수를 믿어’ 오히려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영어 이름은 Linton John Alderman이라는 분인데요. 한국이름으로는 인요한 박사님『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이런 책을 냈어요. 4대째 전라도 지역에서 한국을 위해서 헌신한 귀한 선교사님 가정인데요.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인 이분은 본인이 직접 신청해서 한국 시민권을 얻은 분입니다. 그의 외증조부가 유진 벨 박사(Eugene Bell, 1868-1925)인데요. 117년 전에 호남지역으로 선교사로 파송 받아서 교육, 의료부분에 크게 공헌한 선교사님이고요.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William Alderman Linton, 1891-1960) 선교사님도 신사참배 거부도 하고, 한남대학교를 설립하신 귀한 선교사님이시고요. 그의 아버지 휴 린튼 목사님은 한국전쟁에도 참전하였고 순천에 결핵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워 결핵퇴치 활동을 전개한 귀한 선교사님 이십니다.

네 번째 선교사가 된 이 분은 정말 한국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1993년 한국형 119구급차를 개발해 보급하게 되었는데 특별히 북쪽에 고통당하는 우리 이웃을 위해서 그렇게 헌신하고 계세요. 제가 이 분을 만났더니요, 얼마나 한국말을 잘하는지, 얼굴은 미국 사람인데 목소리는 한국 사람이에요. 대부분 미국 분들이 처음 오면 그 미국 악센트가 있어가지고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데 이분은 그런 악센트가 없어요. 그냥 한국말을 잘해요. 아주 한국 사람처럼 농담도 잘하시고요. 참 재미있어요. 그런데 이제 ''왜 한국 사람들이 북한 사람 안 돕느냐고, 북한에 저렇게 굶주리고 병든 사람이 많은데 돕자고. 교회들이 앞장서 달라고.'' 그런 부탁을 저에게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낮은 사람, 소외된 사람들 곁에 같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붕 꼭대기에 걸고 있는 교회가 못 사는 사람, 못 먹는 사람과 분리된다면 교회의 존재 이유가 없어집니다. 저는 한국에 은혜 입은 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직 10%도 못 갚았다고 생각합니다. 전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합니다.” 대단한 분이에요. 김치찌개 좋아하고 삼겹살 잘 잡수시고. 한국을 너무나 사랑해요. 그래서 늘 북한에 가서 구제활동을 하시고. 국경을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한 그 사랑의 모습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릅니다.

아주 부자집 가문에 태어나서 공부를 많이 했어요. 신학박사, 철학박사, 의학박사, 음악박사.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1875-1965)라는 분인데요. 그 당시 유럽에서 이 파이프오르간 연주자로 아주 이름을 떨친 분이에요. 그렇게 오르간 연주도 잘하고 그 본인이 배운 지식은 많은데 주님의 음성을 듣고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을 바쳐 헌신합니다. 가서 저들을 다 돌보아주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 일생을 섬겼어요.

그 섬기다가 선교비가 떨어지면 유럽에 와서 연주회를 해요.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면 많은 사람들이 와서 또 연주회 때 기금을 내주면 그걸 또 모아가지고 아프리카가고, 가서 선교를 하고. 평생 그렇게 살다 가신 귀한 선교사님.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님, 제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존경하는 분인데요. 이런 말씀을 했어요.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는 이 땅의 세입자로서 우리가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임대료이다.” 우리 이 땅에 사는 게 잠시 주님이 이 땅에 머물러 살게 하니까 임대료, 월세를 내야 되는데, “인간은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이며 이 세상에서의 목적은 ‘ 소유하고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베풀고 봉사하는 것’이다. 그 외의 다른 의미란 있을 수 없다.” 아,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 움켜쥐고 살지 말고 펼쳐 구제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다른 돈은 다 아껴도 구제하고 선교하는 돈은 아끼면 안 돼요. 아낌없이 구제하고 아낌없이 선교해야 됩니다. 할렐루야.

작년 연말에 우리가 생필품 팩키지를 만들어서 10,000가정을 섬겼어요. 10,000 가정. 그랬더니 얼마나 감사하던지.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다 섬겼어요. 이것은 하나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힘서 구제해야 되요, 힘써 있는 거 다 나눠도 또 주세요. 다 나눠도 또 주세요. 할렐루야. 우리가 투르카나 헌금을 한 번 주일에 광고했는데 많은 분들이 참여해가지고 이제 올해 기공식해서 땅을 파고 내년되면 학교가 없는 그 지역에 중 고등학교가 서게 됩니다.

누가 또 그러더라고요. 병원도 없는데 병원도 같이 짓자고. 그래서 혹이 하나 더 붙었어요. 감사한 마음으로 다 중 고등학교 옆에다가 진료소도 하나 만들어가지고 병도 고쳐주어야 되겠다. 또 기숙사도 만들고. 점점, 점점 더 확대가 되지만 그러나 해야 됩니다. 할렐루야.

3. 사랑의 표현

세 번째 사랑의 표현,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사랑은 실천되어야 되요. 말만 가지고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해놓고는 아무 것도 하는 거 없으면 가짜 사랑이에요.

진짜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예수님을 아낌없이 이 땅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셔서, 우리 인류를 위해 주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잖아요. 그 사랑이 우리를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여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누가복음 10장 33절, 34절에,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사마리아인이 누구인가?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람 취급을 안 해요. 왜냐하면 혼혈족속이라고. ‘신앙의 전통성을 잃어버리고 이방인과 혼혈한 저 사람들은 우리가 사람으로 취급할 수 없다.’ 그래서 아주 짐승처럼 여겼어요. 멸시했습니다. 사람취급도 안 하고 대화도 하지 아니하고. 아주 자기들이 보기에 열등한 사람들로 보았어요.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을 어떻게 했겠습니까? 마음속에 증오심이 있지요. ‘자기들이 무엇이라고 이렇게 무시하고 깔볼 수가 있나?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외국에 점령당해 가지고 거기서 어쩔 수 없이 그들과 결혼해서 혼혈족이 된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왜 우리들을 사람 취급을 안 하느냐.’ 미움, 분노가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런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상처입고 쓰러져 있는 유대인을 보고 불쌍히 여겨, 불쌍히 여겨. 할렐루야. 우리 마음에 이 마음이 있어야 돼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 병든 사람, 문제 있는 사람,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지요. 여러분 정말 행복하게, 정말 그 누구보다도 가진 것 다 갖추고 살고 있잖아요. 제가 평양을 3번 갔다 왔습니다만 평양하고 평양 밖에 사는 사람하고 너무 차이가 있는 거 같아요. 우리가 그 분들을 사랑으로 돌봐줘야 돼요.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이 불쌍히 여겼어요. 가서 보고 상처를 보니까 막 피가 나니까 포도주를 뿌려서 알코올이 있으니까 소독했지요, 또 기름을 발라서 상처를 좀 아물게 해가지고 그 다음 나귀에 태워서 주막으로 여관에 데려다 놓고 그리고 여관주인에게 돈을 맡기면서 내가 다시 올 테니까 잘 돌봐달라고.

누가복음 10장 35절에,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다시 와서 주겠다. 필요한 돈을 주겠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세요. 주막은 어디냐? 교회입니다. 교회에 상처 입은 사람, 병든 사람을 많이 데려와서 치료받고 새 힘을 얻게 하고. 내가 다시 오리라. 할렐루야. 주님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이 두 데나리온이 뭐냐? 많은 성경 연구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해석을 했어요. 그런데 두 데나리온을 가장 많이 해석한 해석 중에 하나는 신약과 구약이다. 또 어떤 쪽에서는 2천년 후이다. 예수님이 2천년 만에 다시 오신다. 뭐 이런 이야기들을 했는데 그것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지금도 돌보아주고 계신다는 거예요.

이제는 교회에 그 돌보는 사명을 맡겨서 이제 교회에서 상처 입은 영혼을 돌보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무나 오게 아무나 오게 상처 입은 사람 병든 사람 누구나 오게. 그들을 사랑으로 우리가 돌봐줘야 됩니다. 할렐루야.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주시고 그 다음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받은 우리는 이제부터 ‘주여,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 원합니다. 내가 물질로 구제하고 내가 또 내 몸으로 나가서 헌신하고 섬겨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 많이 이번에 여름에 월드미션으로 전 세계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또 리바이벌 코리아로 전 한국의 농촌까지 다 내려가서 섬겼어요. 그런데 저희 청년 한 사람이 저한테 편지를 보내 왔어요. ‘목사님, 목사님, 저는 어릴 때부터 너무나 아버지한테 맞으면서 자라가지고 상처가 많았어요. 아버님이 술만 먹고 오면 저희들을 그렇게 때렸어요.’ 그러게 술 먹지 말아요. 왜 그렇게 술 먹고 때리고 그래요, 참 사람들이.

아, 그 편지를 보니까 내가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왜 어린 딸을 때립니까? 어린 딸이. 어디 딸이 귀하기만 하더만, 그 딸을 때리고 말이죠. 절대 애한테 그러면 안돼요. 더군다나 술 취해 가지고 애를 때리면 안 돼요. 이게 술이 마귀에요. 우리 나라는 술 먹는 그런 문화가 제대로 안 되어 있어요. 취할 때까지 먹기 때문에 문제예요. 그래 취하게 먹으니까 그렇게 못된 짓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자매가 자기는 상처가 많았데요. 상처가 많아 가지고 교회 와서 신앙 생활하지만 그 마음에 상처가 있었는데 이번에 리바이벌 코리아에 다 나가라고 그래서 목사님 설교 듣고 땅끝마을에 갔는데 거기가보니 자기는 너무나 그 아이들보다는 받은바 은혜가 많고 축복이 많아서 오히려 자기가 주님 앞에 더 크게 감사를 드리고 자기가 달라졌다는 거예요. ‘내가 참 어렵게 힘들게 이렇게 고통 가운데 살아왔구나.’ 하고 가봤더니 거기는 자기보다 더하더라는 거지요. 버림받은 사람, 버림받은 아이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아이들. 그래서 제가 가서, 목사님 제가 요번에 가서 은혜 받고 제가 달라졌습니다.

여러분, 상처가 누구에게나 있어요. 그러나 우리보다 더 많이 상처를 받은 사람이 더 많아요. 그러니까 내 상처만 바라보지 말고 이제 여러분이 선한 이웃이 되어서 상처 입은 이웃들을 돌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품어줘야 되요. 그들을 용서해야 되요, 그들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교회로 데리고 와서 잘 사랑으로 보살펴 줘야 될 것입니다.

평생 쪽방촌에서 노숙인들을 섬긴 김흥용 목사님이 책을 썼어요.『쪽방동네 거지왕초』서울역 일대의 쪽방주민과 노숙인 2천명을 돌보고 있는 목사님. 어릴 때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가지고 노숙 생활했던 것이, 그것이 자기가 늘 기억에 있었고. 그 다음에 예수 믿고 나서 한국은행에서 20년 동안 있었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목사가 되었어요. 그래서 퇴직금을 다 받아가지고 그 쪽방촌 있는 데에 나사로의 집을 만들었습니다. 이 나사로의 집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고 있는데요. 이렇게 말합니다.

“쪽방 주민들에게 가장 힘든 계절은 여름입니다. 비좁은 데다 환기가 되지 않아 말 그대로 ''찜질방''이죠.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쪽방 주민들이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곳에서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체력단련도 하고 샤워도 할 수 있는 쉼터가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이 나사로의 집을 세우고 매일같이 밥을 먹여주고 겨울에는 또 여러 군데 기증 받은 옷들을 나눠주는 그러한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또 15년이 넘게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사람들은 사랑의 쌀독을 운영해가지고 쌀을 모금해가지고 쌀을 나눠주고, 쌀을 나눠줘요. 목사님은 뇌졸중 후유증과 위암으로 4차례 대수술을 받고도 불편한 몸으로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고 있어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만 행복해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이웃이 행복해야 합니다. 참 행복을 원한다면 이웃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목회 일선에선 은퇴했지만 쪽방 주민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여생을 그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귀한지. 여러분 사랑을 받았으니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속의 미움과 상처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 받아서 이제는 ‘주여, 이제부터는 사랑하며 살기 원합니다. 용서하며 살기 원합니다. 사랑의 실천자로 살기 원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오늘부터 우리 주변을 살펴서 병든 사람, 문제 있는 사람, 고통당하는 사람, 어려움 당한 사람을 찾아서 기도해주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주의 사랑으로 보살피는 사마리아인 같은 삶을 살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 기억해야 됩니다. 따라하세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주님, 저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기 원하오니 우리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와 같은 복 받은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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